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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 역사와 문화재

Z 정보 2022. 9. 28.

서울
서울

 

서울 역사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관해 학계에서는 삼국시대 신라 때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 혁거세왕에 대한 내용을 보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 또는 서벌, 사라, 사로라고 했고, 이후 이것이 도읍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수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시대 서울은 백제 온조왕 때부터 제21대 개로왕 때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습니다. 오늘날 송파구에 남아있는 풍납토성이 당시의 왕성이었고, 위례성, 혹은 한성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라가 진흥왕 때에 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신주를 설치하였고 선덕왕 때에는 서울 지역을 한산주로 개칭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을 9주로 나누게 되면서 경덕왕 때에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서울 지역은 초기에는 양주로 불렸다. 그 후 문종 때에 남경으로 승격되었다가 원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중앙과 지방 조직을 개편하면서 한양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조선시대 정식 명칭은 한성부였으며 이외에도 당시 만들어진 고지도나 문집 등에는 한양, 경도, 경성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울 명칭 과정

일제강점기에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된 하위 관청으로 격하시켰으며 대외적인 정식 명칭은 일본어 발음인 게이조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경성이라는 단어는 원래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였던 것이었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 경성이라는 단어는 역사적, 혹은 문화적으로 일제강점과 관련된 단어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서울은 서울, 경성, 한성 등 혼재된 이름을 사용했다. 심지어 미군정 표기와 서울시 자체 표기가 다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년 후인 1946년 8월 10일자로 서울특별자유시로 이름이 바뀌었고, 경기도와 대등한 관계의 행정기관이 되었고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서울특별시로 정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인 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 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때인 1867년 중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 이었습니다. 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습니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습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 창덕궁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입니다. 140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입니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가로 576cm 세로 273cm 이며 순조 30년에 불타버린 환경전과 순조 34년에 중건된 통명전 경복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대는 1826년 ~ 1828년 경으로 추정됩니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먹과 채색 물감으로 당시 궁 안에 실재했던 누정, 다리, 담장은 물론 연못, 괴석 등의 조경과 궁궐외곽의 경관까지 세밀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화공기법과 정밀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에 동궐도는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궁궐 연구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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